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칼레 해전 (문단 편집) == 전투 경과 == 1588년 8월 8일, 어쨌든 우에상섬을 돌파한 [[무적함대]]와 실리섬에서 발진한 잉글랜드 초계함대의 조우를 시작으로 전쟁이 개시되었다. 곧이어 양측 주력 함대의 전투이 벌어지자 격렬한 함포전을 벌였지만, 서로 피해를 주는 데는 실패하고 이때 입은 유일한 무적함대의 손실은 [[갤리온]] 1척과 [[카락]] 1척, 그것도 신호 오인과 돌풍으로 인한 충돌에 의한 것뿐이었다. 당시 잉글랜드 해군의 함선 [[대포]]들이 긴 사정거리를 갖고 있어서 스페인 함대를 원거리에서 농락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설은 외국 다큐멘터리 필름들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인양된 스페인 함선의 포들은 포 규격이 제각각이고 근접전투용 소형 포들도 다수 실려있어서 원거리 전투용 함포의 숫자에서 밀렸다는 것. 다만, 잉글랜드의 '신형포'가 스페인보다 사정거리가 길어서 전투에서 이겼다는 이야기는 [[이원복]]의 [[만화]]《[[먼나라 이웃나라]]》가 퍼뜨린 대표적 오해이다. 사실, 양측이 사용한 대포는 모두 [[독일]]이나 [[이탈리아]]산이었다. 대구경의 대포를 생산해도 사용하기 힘들었고, 그에 따라 작은 구경 대포를 쓰다 보니 그만큼 탄환의 크기가 줄어들어 같은 양의 화약을 넣었을 시에 '상대적으로' 사정거리가 길긴 하다. 또 아무래도 상선 출신이 많았던 스페인 해군보단 해적(...)출신이 많았던 잉글랜드 해군이 대포의 장전속도만큼은 더 빨랐다고 한다. 잉글랜드 해군이 원거리에서 알짱거리며 포격을 실시한 것은 잉글랜드 해군의 대포가 사정거리가 긴 하이테크 비밀무기라서 그런 게 아니고 당시 메디나 시도니아가 외곽에 강력한 갤리온 포격함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지상군 드랍이 목적이었지, 잉글랜드 해군을 조지는게 목적이 아니었다. 따라서 메디나 시도니아는 포격함을 외곽에 배치하여 수송 선단을 보호하는 진형으로 진군했고, 잉글랜드 해군은 그 사정거리 근방에서 알짱거리면서 포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메디나 시도니아도 무조건 전투를 회피한 것은 아니었다. 메디나 시도니아의 판단으로는 스페인 해군이 잉글랜드 해군을 이기는 방법은 잉글랜드 함선들에 근접하여 백병전을 펼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그는 잉글랜드 해군을 최대한 최대한 유인하기 위해 노력했고, 잉글랜드 해군이 대담한 돌격을 해왔다면 맹렬한 전투가 벌어졌겠지만, 시종일관 잉글랜드 해군은 추격 격파하기에는 성가신 거리에서 기동했다. 이 4일간의 전투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드레이크는 야간 기동에서 선두를 맡아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있었다. 선두에서 미등으로 함대를 유도하며 전진하던 중 금화가 많아 보이는 화려한 배를 발견, 이를 나포하고 싶은 욕심에 미등을 끄고 기함 혼자서 그 배를 추격. 결국 나포했고 드레이크의 금 냄새 맡는 능력은 틀리지 않아 많은 [[금]]을 노획한다. 그러나 결국 나머지 함대는 제독을 잃고 방황하게 되고 드레이크 자신은 자기 함대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 기간 동안 해당 전력은 전열에서 제외되게 되니 하워드 제독은 꽤나 속이 뒤집어 졌을 것이다. 칼레 화공 이후 일이지만, 하워드 제독은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백병전]]을 감행하거나 좌초한 배들 약탈에 열중하는 드레이크를 더이상 참지 못하고 해임시키게 된다. 그러나 그 덕에 다른 제독들보다 먼저 런던에 도착한 드레이크는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시민들에게 말빨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라 더욱 인기가 상승하게 된다. 당시 잉글랜드 왕실은 [[헨리 8세]]가 너무나 돈을 많이 쓴 낭비와 그에 따른 재정난이 있었기에 해군에 대한 비용이나 징집 인원에 대한 보수는 고사하고 징발한 상선에 보상해줄 만한 재정도 부족했다. 그런데 드레이크가 앞서 말한 상당량의 금을 약탈해서 여왕에게 바친 덕에 여왕은 근심을 날려버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신임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은 돈인가?~~~ 결국 무적함대는 4일간 4번의 싸움을 모두 물리치고 사소한 흠집만 입은 상태로 도버 해협에 이르렀다. 지상군의 준비가 늦어지는 바람에[* 사실 이 지상군은 네덜란드 독립군의 함대에 봉쇄당하는 바람에 늦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합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스페인 함대는 칼레 앞바다에 정박했다. 본래 이 시기는 남풍이 부는 시기라 스페인 측은 [[화공]]은 예상했지만 소형 선박들을 외곽에 분산 배치하는 정도로 화공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갑자기 바람은 북풍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우연한 바람을 '프로테스탄트의 바람'이라고도 한다.] 하워드 제독은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판단, 상선값을 후하게 물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대형 상선을 동원해 화공을 펼친다. 이 당시의 화공선은 단순히 불을 붙인 배를 상대 배에 충돌시키는 것이 아니라, 배에 화약을 비롯한 인화성 물질을 가득 실어서 보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근처에서 폭발만 해도 치명적일 수 있었으며, 스페인군은 이를 매우 우려했다. 따라서 외곽의 소형 선박들은 화공선이 접할 경우, 갈고리를 걸어 함대 바깥쪽으로 예인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만일 이것이 실패하면 전 함대는 닻줄을 끊고 회피기동을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